사진으로 본 100년사

대구남산교회 창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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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12월 30일, 대구남산교회의 창립과 역사적 출발! 대구제일교회로부터 분립하여 대구 읍성에서 세 번째 교회로 설립되었다. 경북 선교의 아버지 브루엔 선교사가 265명의 교인과 함께 설립하였다. 초창기 대구남산교회는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와 신정교회(현 서문교회)와 더불어 대구 3처(三處) 교회로 불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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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남산교회 첫 예배당! 목조 양철집 건평 50평으로 시작 1915년 10월 3일 주일 낙성식 연합예배 나무 종각이 예배당 입구 우측에 세워짐 두 번째 예배당 (당시 동아일보에 소개됨) 백남채장로의 조선요업에서 만들어진 붉은 벽돌로 지음. 1931년 철주 종각이 세워짐 1930년 12월 21일 주일 입당식 본당 증축•중수공사 및 새 종각 설치 1972년 12월 24일 헌당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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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교육관 완공 현재는 복지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2010년 6월 교육센터 완공 교회학교 주일예배 장소와 교회 식당으로 이용하고 있다.

현재 본당과 복지관, 교육센터의 합성 사진

 

대구남산교회 창립
 < 브루엔 선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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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enry Munro Bruen, 한국명: 傅海利(부해리)
  • 1874년 10월 26일 미국 뉴저지 출생, 제임수 브루엔 목사의 차남
  • 1896년 5월 프린스턴 대학교 졸업
  • 1899년 뉴욕 유니언신학교 졸업, 목사 안수
  • 1899년 10월 26일 25세 나이로 미국 북장로회 소속으로 대구 선교지부에 세 번째 선교사로 부임
  • 1915년~1919년 대구남산교회 설립자 겸 초대 담임목사
  • 1923년 제3대 담임목사
  • 1959년 3월 26일 84세로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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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uen Martha Scott 브루엔 선교사의 첫 번째 부인인 부마태 선교사 동산의료원 은혜정원에 안장 신명여자소학교(현재 신명고등학교)를 세운 대구 최초 여성교육의 선구자 Clara Mathilda Hedberg 두 번째 부인 하복음 선교사 브루엔 선교사의 <한국에서의 40년>의 편집과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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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선교의 아버지 브루엔 선교사 42년 간 대구와 경북지역 56개 교회를 개척하였고, 1941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당할 때 그의 나이는 67세였다. 브루엔 선교사의 전도하는 모습 김천 어느 지역 개천 둑으로 여겨지는 곳에서 유교 전통의 어르신이 둑에서 쉬고 있을 때 아래에 서서 쪽 복음지를 들고 전도하는 모습 칠곡, 선산, 김천, 성주, 고령, 군위 등 경북 서부 지방을 순회하며 선교하였다. 순회 선교할 때 주로 자전거를 이용하였고 (대구에서 자전거를 제일 먼저 소개), 당시 자전거를 본 사람들은 ‘안경말’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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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개(마크)와 전도 수단 정재순씨는 사냥개 마크가 선교사님 말씀을 알아듣고 식사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회심하여 서문교회 초대 목사가 되었다. 야구 놀이를 통한 전도 브루엔 선교사에세 야구를 배웠던 아이들 가운데 훗날 독립운동가와 목사가 되었던 김학철, 이갑성, 김주호 등이 있었다.
나라사랑과 3•8 만세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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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련 장로 (38 만세운동의 핵심인물) 김태련 장로의 집과 남산교회에서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준비하였고, 3월 8일 서문시장에서 소달구지에 올라 독립선언문 낭독하고 수감되었다. 김용해 성도의 순국과 묘비 (대구광역시 신암동 독립유공자 묘역) 부친 김태련 장로와 함께 38 만세운동을 외치다가 말발굽에 짓밟혀 시궁창에서 실신하였고 부친과 함께 수감되었다. 끔찍한 고문으로 인해 치명상을 입고 가출옥 되었으나 결국 이틀만에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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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채 장로 (38 만세운동의 중심인물) 38 만세운동 직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대구요업회사를 운영하면서 임시정부에 자금을 조달하였고, 여기서 생산된 적벽돌로 1930년 벽돌건물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동생은 백남규 장로. 이만집 목사 (38 만세운동의 중심인물) 김태련 장로와 함께 대구시위를 총 지휘하였다. 김태련 장로의 선언문 낭독 후 만세삼창을 외쳤고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아들 이성해도 함께 참여하였다. 교회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38 만세운동의 중심인물인 (좌측부터) 백남채 장로, 김태련 장로와 김용해 성도, 이만집 목사의 부조를 교회 정문에 새겼다. 이 외에도 약 20여 명의 교인들이 주도적으로 참가하였고 때로는 옥고를 치르며 고난을 당하였다.
교회 부흥의 불길
성경공부와 기도, 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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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주 목사교회 부흥의 초석 1924년 부임하여 자치파동의 아픔을 치유하고22년간 담임목사로 시무하였고 총회장을 역임하였다.두 번째 예배당을 건축하였고, 교육운동과 사회계몽운동에 앞장섰다.외부로부터의 억압이 있었으나 교회 부흥의 초석을 다졌고,당시 출석 교인 수가 1000여 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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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철 장로(목사) 부부 신구약 1,000독, 통독 200회, 유다서 10,000독, 1,000번 주해 1928년 4월 1일 교회에서 개설한 성경야학회를 매일 저녁마다 12년간 인도하였고, 매주 토요일마다 강의한 만국통일 주일공과는 33년간이나 계속되었으며, 미국 타임스에 소개되었다. 최종철 장로(목사)의 성경공부 매일 저녁마다 열린 성경야학회는 대구시내는 물론 경상도 전역에서 몰려왔고, 밤늦게까지 계속되면서 귀가할 수 없는 원거리 수강생들에 의해 철야기도회와 새벽기도회로 이어졌고, 이는 교회 부흥의 불꽃이 되었다. 현재와 같은 매일 새벽기도회는 해방 후 또는 1•4후퇴 때부터 생긴 것인데, 이전에는 부흥회나 특별집회 시에만 진행되었다.
청년운동과 사회정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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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대구 YMCA (1915년) 1915년에 발기한 대구YMCA는 브루엔, 이만집 목사를 중심으로 남산교회 지도자들이 깊숙이 관여하였다. 이어서 신진욱 장로와 이철상 장로, 김신향 장로가 대구 YMCA 이사장을 역임하였고, 김신향 장로는 현재 전국 YMCA 부이사장으로 섬기고 있다. 금주•금연운동 1933년 조선절제회가 주도가 되어 ‘주마정벌군’(酒魔征伐軍) 결단식 등 금주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났고, 이는 영적 운동에서 사회개혁으로 확대되어 한국적 민족운동으로 승화되었다.
민족 해방과 815 광복의 종 do_2.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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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이후 일제의 노골적인 수탈은 극심해졌고, 전쟁물자조달을 위해서 각 교회의 종을 수탈해갔다. 남산교회는 이문주 목사와 장로들의 기지를 통해 기존의 종을 땅속에 숨기고 다른 종을 매입해서 대납하였다. 그런데 일본의 패망과 대한민국의 독립을 알리던 1945년 8월 15일에 대구의 하늘에 이 종소리가 울려퍼지게 되었다. 해방과 자유의 종소리에 교인들뿐만 아니라 시민들도 그 감격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현재 역사적 보전을 위해 당시의 똑같은 종을 만들어 보관하고 있다. 현재 대구시 중구 골목투어 <근대의 여행> ‘5코스’에 지정되어 있다.
시대를 통해 쓰임받은 지도자 do_2.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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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암 목사 1963~1981년 제10대 담임목사 인성덕성영성의 목회자로서 지역사회에서 성자로 널리 알려졌다. 진희성 목사 1982~2003년 제11대 담임목사 특수 선교의 시대를 열었고, 교회 성장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우측 사진) 1천명 성도 돌파 기념예배 (1892)
특수선교 – 장애인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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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문선교회 1983년 6월 12일 지체장애인 미문선교회 설립 이원일, 김권, 변창식 등이 중심이 되었고, 이철상장로, 김성한장로, 신한철장로의 헌신이 뒷받침 되었다. 사랑선교회 중증장애인과 지적발달장애인의 영적, 정신적, 사회적 성장을 위해서 1991년 ‘토요열림마당’을 시작으로 변화와 성장을 거쳐서 현재 사랑선교회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 에바다선교회 2011년 농아인 및 청각장애인인의 선교회 설립. 현재 주일예배에서 수어를 동시통역하고 있다.
특수선교 – 누가의료선교회와 학원선교회, 목요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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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의료선교회 1987년 8월 누가의료선교회 설립 전문적인 의료 달란트의 인적자원이 많은 교회로서 농어촌 주민 진료와 지역사회 빈민계층과 외국인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무료진료를 진행하였고, 1997년 이후 해외의료선교를 계속해서 진행하고 있다. 학원선교회 - 고교찬양제 1989년 3월 26일 설립되어 학원에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감당하여 왔다. 현재 송현여자중학교와 경원고등학교에 교목을 파송하고 있다. 그리고 1997년부터 단독으로 ‘고교찬양제’를 주관하고 있는데 해마다 시내 고교 20여개 팀이 참여하고 있다. 목요선교회 - 모세대학 노인선교를 진행하고 있었으나, 1991년 3월 28일 목요선교회를 출범하여 지역사회의 노인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현재는 이를 계승하여 70세 이상의 성도들을 위하여 모세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특수선교 – 외국인선교회(영어권, 중국어권)와 호스피스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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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근로자 선교회 1995년 외국인 근로자들(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터키, 파키스탄 등)을 대상으로 선교회를 세웠다. 처음에는 연합예배를 드렸으나 2001년부터 영어권선교회와 중국어권선교회가 분리 독립하여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다. 좌측부터 영어권선교회, 중국어권선교회 활동 모습이다.

 

호스피스선교회 1992년 2월 진희성 목사의 강조에 힘입어 발족되었고, 대구에서 시작된 동산병원 호스피스 프로그램은 남산교회의 적극적인 참여에서 비롯되었다. 현재 남산교회 150여 명의 회원과 10명 이상의 호스피스 봉사자들이 동산병원 74병동을 섬기고 있다.
이웃사랑 복지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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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남산교회 어린이집 1981년 5월에 ‘새마을 유아원’을 개원하였고, 1992년 취학 전 교육기관으로 ‘어린이집’을 인가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건강하고 모범적인 어린이를 양육하고 있다.

 

대구남산복지재단 미문선교회 창립 10주년을 맞이하면서, 교회는 사회복지법인을 설립하기로 결의하고 기본 자산 5억원을 출연하여 1997년 10월 대구남산복지재단 산하 사회복지관을 설립하였다. 1998년 3월 남산기독교종합사회복지관 허가를 받고 장애인 복지를 포함해 어려운 이웃을 섬기는 종합복지의 지평을 열었다.
지역을 섬기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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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생 목사 2009년 ~ 현재 제13대 담임목사 보아스 봉사단 2015년 11월 창단하여 세 선교회를 운영하고 있고, 지역사회를 섬기고 봉사를 통하여 복음을 전하는 봉사단체이다. 좌측부터 집수리선교회, 새생명선교회, 희망나눔선교회 활동 모습이다.
교회창립 100주년 기념감사예배 및 10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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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창립 100주년 기념 감사예배 2014년 12월 28일 주일 교회학교 영아부부터 청년부를 포함한 전 교인이 참석하여 감사와 감격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렸다. 교회 창립 100주년을 맞은 2014년 교회 표어 (좌측) 남산교회 100년사 (위), 브루엔 선교사의 한국생활 40년 (아래)